What is CEO 최태원 SK그룹의 변화와 도전은 한국경제의 성장 축이다 1부


What is CEO

최태원 SK그룹의 변화와 도전은 한국경제의 성장 축이다 1부

최태원 SK그룹의 변화와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최 회장의 보폭이 매우 빠르게 변화의 길을 걷고 있다. 더불어 지난 3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중책까지 맡았다. 명실공히 한국 기업의 중심이 되었다. 최근 크고 작은 인수와 합병, 계열사의 기업공개, 투자, 매각, 인적 분할 등 경영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기업 변화의 보폭이 화려하게 진화한다.

그동안 SK그룹의 대표 선수는 정유 화학과 통신에서 반도체와 배터리로 옮겨갔다. 그리고 친환경 에너지와 바이오, 플랫폼과 미디어 등에도 핵심 역량이 집중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이끄는 변화와 도전에 대한 진화는 그 방향성이 한국경제의 성장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매우 뚜렷하다. 엄금희의 CML 경영연구소에서는 창업주인 고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으로 이어진 변화와 도전에 대한 경영 전략과 경영의 핵심 키워드와 방향성에서 한발 더 나아가 미래 전략까지 심층 시리즈로 전망해보고자 한다.

Editor 엄금희

앞서가는 기업 성장과 기업 문화를 주도한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의 변화는?

1970년대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선경이 협찬하던 장학퀴즈와 선경직물의 스마트 교복을 즐겨 입었다. 그때 선경그룹은 섬유회사에 불과했다. 그 후 선경그룹은 정유와 통신을 양날개로 하는 SK그룹으로 발전했다. 그 변화와 도전은 고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 최종현 회장은 대한 석유공사, 현 SK이노베이션과 한국이동통신, 현 SK텔레콤 인수에 성공한 뒤 무자원 산유국에 대한 희망을 현실로 만들었고, ICT 강국의 기틀을 만들었다.

고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형인 최종건 선경그룹 창업주에 이어 제2대 회장에 오르면서 SK를 세계 일류 에너지 회사와 화학 회사로 키우겠다는 거대한 꿈을 드러냈다. 섬유회사에 불과한 선경이 원유 정제는 물론 석유화학, 필름, 원사, 섬유 등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선언한 것은 불가능을 가능한 희망으로 바꾼 변화와 도전이었다.

고 최종현 회장은 1980년 대한 석유공사, 현 SK이노베이션을 인수하면서 그의 경영 전략을 현실로 바꿨다. 지금은 1조 원 대 기업들이 많지만 그 당시 유공은 연 매출 1조 원을 돌파한 우리나라 유일의 기업이었다. 우리나라 유수의 재벌들이 눈독을 들이고 유공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강소기업이었던 선경이 유공 인수에 성공했다. 그때 언론은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라고 대서특필했다. 변화와 도전에 대한 변곡점이 이때부터 한국경제의 성장과 함께 발전했다.

새우가 고래를 삼킨 이유는?

선경그룹인 새우가 고래를 삼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섬유에서 석유까지, 수직계열화를 경영 목표로 세우고 석유 사업 진출을 10여 년간 전략적으로 준비했다. 특히 중동지역 왕실과 네트워크에 공을 들이면서 오일쇼크 상황에서도 국내에 원유를 들여올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 같은 석유 외교 능력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으면서 그가 유공의 최종 인수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

'10년을 준비해야 한다'라는 이야기에 인색할 필요는 없다. 미래 성장 동력 그 이유는?

10년을 준비한 사람은 바로 고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이었다. 기업이 어떤 사업이든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년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고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의 경영철학이었고 신념이었다. 이때부터 고 최종현 회장에게 언론은 "10년을 내다보는 기업인"이라는 평가로 그를 준비된 기업인으로 본받아야 할 CEO로 수식어처럼 따라다녔다.

고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대한 석유공사, 유공을 인수한 뒤 단순히 우리나라에 원유를 공급하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1983년부터 해외 유전 개발에 도전했다. 위험부담이 많고 성공 확률이 5%에 불과해 주변에서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뚝심 있게 사업을 추진해 1984년 북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이 무자원 산유국 대열에 오르는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이후 1991년 울산에 합성섬유 원료인 PX, 파라자일렌 제조 시설을 준공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그룹이 되었다.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희망은 언제나 현실이 되는 꿈을 실현했다. 이동통신 사업 역시 10년 이상 공들이면서 준비했다. 미래전략이 그룹 총수의 역할이라고 강조한 고 최종현 회장은 산업 동향 분석을 위해 1984년 미국에 미주 경영실을 세웠다. 이후 정보통신 분야를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은 고 최종현 회장은 미국 ICT 기업들에 투자하고 현지법인을 설립하며 이동통신사업을 준비했다.

미래 경영전략으로 앞선 준비 끝에 1992년 압도적 격차로 제2이동 통신 사업자에 선정됐다. 숙원 사업이던 정보통신 사업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고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 사업권을 반납한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었던 그가 제2이동 통신사업자로 선정되면 재계의 화목이 깨질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아들인 최태원과 노태우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이 결혼함으로써 사돈이었던 만큼 특혜 시비에도 신경을 썼다.

결국 고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내부를 조직을 추스르고 과감히 새로운 기회를 모색한다. 그의 철학은 "준비한 기업에는 언제든 기회가 온다"라며, 이후 민영화되는 한국이동통신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당시 상장회사였던 한국이동통신 주가는 8만 원 수준이었는데 민영화 소식과 함께 30만 원 가까이 상승했다.

선경그룹은 당시 시가를 훨씬 뛰어넘는 주당 33만 5000원, 총 4271억 원을 써내면서 지분 23% 인수에 성공했다. 그룹 내부에서조차 인수가가 지나치게 높다며 '승자의 저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고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특혜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합당한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앞으로 회사 가치를 더 키워가면 된다"라고 임원들을 설득했다.

사업보국을 먼저 생각한 경영정신은?

선경그룹이 한국이동통신 인수에 성공하면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얻는다. 이후 SK텔레콤은 세계 최초 CDMA 상용화에 성공하며 우리나라가 ICT 강국으로 올라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 최종현 회장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뒤 전폭적인 지원을 했기에 가능한 현실이다.

고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선경그룹을 재계 5위까지 올려놓았다. 그리고 항상 사업보국, 국가 경제를 먼저 생각했다. 전경련 회장 시절인 1997년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암과 싸울 때도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청와대를 찾아 경제 살리기를 호소했던 얘기는 오래도록 회자되고 있다. 고 최 회장은 우리나라가 IMF, 국제통화기금의 긴급 지원을 받게 되자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이후 병세가 악화한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1998년 8월 26일 69세로 영면했다.

고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경영전략에 대한 희망을 말할 때마다 그 기반을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람에서 찾는 인재경영을 펼쳤다. 사람 중심의 경영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경영관리에 있어서도 사업주의 판단이 아니라 SKMS, 선경 경영관리체계를 만들어 시스템 경영을 실행한 앞서간 기업인으로 존경받는 CEO, 경영인이었다.

엄금희 - 2021.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