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21세기 혁신의 아이콘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인 어머니와 시리아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는 시리아 정치학부 출신의 이민자로 후에 정치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현재는 네바다 주에서 카지노의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고, 당시 잡스의 생모인 조앤 시블은 아버지의 반대로 잔달리와 헤어진 상태였으므로 태어나자마자 아이를 입양 보내려 했다. 그렇게 잡스는 친부모와 헤어져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고[1], 이 불우한 과거는 잡스의 성격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폴 잡스 부부는 스티브 잡스를 친아들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키웠으나[4], 어렸을 때 잡스는 부모 속을 많이 태우는 아이[5]였다고 한다. 아버지 폴의 말에 따르면 스티브는 그렇게까지 천재성을 안 보였다고 한다. 친구와는 달리 학업적으로 천재는 아니었던 듯. 애초에 학교 공부 자체를 많이 하지 않았다.

잡스의 사업가 인생은 고등학교 때 전자공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꿈 없이 살던 잡스는 갑자기 전자공학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휴렛팩커드에서 방과후 수업을 들었다. 1972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휴렛팩커드에 여름 인턴으로 채용된다. 그곳에서 Apple을 같이 세운 동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난다. 인턴이 끝나고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 칼리지 철학과에 입학했다. 한 학기 만에 전공이 맘에 들지 않고 대학생활에 흥미가 없다는 이유로 중퇴했다고 알려졌으나, 2005년 스탠퍼드 대학에서의 연설에 의하면 부모님의 저축을 몽땅 투자할 만큼 자신의 대학 생활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였다. 하지만, 대학 중퇴 후 많은 교양 수업을 청강한 것은 훗날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나중에 UI용 글씨체를 디자인할 때 서예 강의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동양 철학에 특히 관심을 보였는데 그 영향으로 그의 종교는 불교였다. 1970년대에 불교의 선(禪/Zen)사상에 심취하여 '오토가와 고분(乙川弘文)'이라는 일본인 승려 밑에서 수행을 한 적도 있다. 한때는 자신도 스님이 될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을 정도로 심취했었으나 스승의 만류로 다행히도 IT 쪽의 길을 관철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 뒤 1년 정도 문학과 철학에 심취해 있다가, 우연한 기회로 아타리(게임회사)에 게임 디자이너로 취직하게 된다. 그곳에서 퐁(Pong)과 같은 초기 비디오 게임에 빠져버린 잡스는 컴퓨터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아타리에서 또 1년도 못 채우고 사표를 낸다. 그 때 워즈니악은 아직 HP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가 운영하고 있던 '손수 컴퓨터 만들기 클럽'에 가입한 잡스는 컴퓨터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그 후 워즈니악과 잡스는 의기투합하여 직접 컴퓨터 제작에 착수, 1976년 Apple I이라는 PC 역사상에 길이 남을 기종의 첫 번째 프로토타입을 롤아웃한다. 비록 나무 케이스에 모니터조차 없는 투박한 플라스틱 기판과 실리콘칩 덩어리였지만, 꽤 큰 반향을 일으키며 그들에게 꽤 많은 돈을 안겨주었다. 워즈니악의 아버지는 "왜 그 놀고먹는 백수(잡스)와 45:45로 나누느냐?!"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 Apple I을 개발했을 때 당연히 이것을 받아주려는 가게는 없었는데 이때 컴퓨터라는 것은 큰 회사나 대학, 정부기관에서만 쓰는게 일반적 이었고 PC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의도 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다. 그런데 잡스가 이것을 한 가게에 자신의 유창한 말빨로 팔기로 구두계약을 하고 생산을 했는데... Apple I의 사진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모니터고 뭐도 없이 요즘으로 치면 컴퓨터 본체만있는 기기다. 당연히 모니터와 기타 입력장치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주인은 당황하지만 대인배 적인 마인드로 그걸 그대로 판다.

이후 Apple II, Apple II Plus 등 후속 모델들이 차례로 성공하면서 스티브 잡스는 명성과 부를 얻게 되었다.

그는 Today, today, Apple reinvents the phone. 이렇게 말하며 iPhone의 소개를 시작한다. 이때 쓰인 프레젠테이션 기법이 유명한데, 스티브는 iPhone의 세 가지 핵심 콘셉트(Revolutionary mobile phone, iPod with touch control, Breakthrough internet communicator)를 Apple 특유의 앱 모양의 아이콘들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하는 말이 "These are not three seperate devices. These are one device!(이것들은 분리된 세 가지 기기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하나의 기기에요!)"이었다. iPhone이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휴대폰, mp3플레이어, 인터넷을 하나로 합친 편리하고 혁신적인 제품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테크닉이었다.

스티브가 프레젠테이션을 이어가면서 비난한 것은 기존의 "스마트폰"들의 세 가지 점이었다. 첫 번째는 기존의 플라스틱 버튼 입력 체계는 화면이 너무 작아 한눈에 표현할 수 있는 정보량이 적다는 점과 응용 프로그램마다 유저 인터페이스 최적화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쓰는 방법을 익히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고, 세 번째는 그것들이 그닥 "스마트"하지 않다, 즉 기능이 미약하다는 점이었다. 각각에 대해 스티브는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했고 이는 결국 iPhone을 혁신적인 스마트폰으로 만들어 버렸다.

프레젠테이션의 귀재로 유명하다. 새로운 제품을 시장에 소개하는 데에 아주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인 발표 방식을 쓰면서 많은 발표자들의 귀감이 되고있다. 스티브 잡스의 경영 철학은 다음과 같다.

경영은 기존 질서와 철저히 다르게.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정해 직접 몸으로 뛰어라.

항상 새로운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포기하지 마라.

기술력을 과신하기보다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라.

간단하고 단순하게 하라.

2000년대 들어서 스티브 잡스의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2004년에 췌장암 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고 계속 악화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가운데 Apple 측은 주가하락 등을 이유로 건강 이상설을 부인해왔다. 2011년 1월 17일에 잡스가 스위스로 병가를 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다시 그의 건강을 우려하는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췌장암 혹은 이의 후유증으로 추정되었으며, 그의 병가가 알려지자마자 Apple 주가가 6.6% 급락, 시가총액 220억달러가 증발하는 현상이 일어나, Apple이 얼마나 잡스에게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기도 했다. 이 당시 인콰이어러지에서는 6주 시한부를 판정받게 되었다는 보도를 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실리콘밸리 오찬에 참석하기로 하여 루머를 불식시켰다.

그러던 중 2011년 3월 3일 iPad 2 발표회장에 강림, 루머보다 건강한 모습을 보여 경영에 문제가 없음을 과시했고, 잡스 시한부설로 위태위태하던 Apple의 주가는 폭등해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다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iOS 발표때 다시 등장했을 땐 한층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왔으며, WWDC 2011 첫날, 오전 10시의 발표회에도 재등장하였는데 매우 수척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점점 시한부설이 루머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하였다.

2011년 8월 25일, 결국 CEO직에서 사임한다고 밝히고, 대신 Apple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스티브 잡스의 Apple CEO 사임사 전문 그리고 사임한지 불과 두 달 뒤인 2011년 10월 5일,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최재혁 - 2022.08.30.